오늘 교보문고에서 허연의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를 구입했다. 사야겠다는 결심이 든 오랜만의 시집이었다. 꽤 많은 시가 내 맘에 들었다.
말로 할 수 없는 것 / 허연
비는 전쟁이 되어 왔다.
싸늘한 바람에, 너는 아니라고 했지만
나는 믿지 않았고
또 거대하게 물줄기 하나가 흘러갔다
거대한 것들의 참혹함과 허술함
택시를 기다리다 그냥 걷기로 했다
상투적인 강으로
함께 가기로 했다
길과 길에 관한 기억을 지우기로 했다
여기저기 어두운 귀퉁이에서
물이 밀려 내려온다
온통 거칠고 아픈 것들이다
물에 갇힌 날들은 모두 달라서
말로 하지 못한다
나비의 항로 / 허연
기억처럼 더러운 것은 없다
사막까지 따라오는.
아주 먼 길을 왔다.
언젠가는 바다 밑이었다는 북구의 항구도시를 떠나
살 만큼 산 나비처럼
기류에 떨다
밀리고 밀려서 남쪽으로 왔다
사막,
쓰고 말한 모든 것들이 사라진다는 곳
아무것도 남겨 놓지 않는 기적이
하루 종일 일어난다는
생전 처음 듣는 모래 바람 소리는
자꾸만 기억을 불렀다.
혼자서 먼 길을 왔다.
사막에만 산다는 포아풀 더미와 섞여
기억이 따라서 굴러 왔다.
저항하지 못한 게 문제였다.
이 낯선 모래 무덤 위에도
그놈의 소금기, 소금기가 묻어 있다.
-
혹은 이런 싯구들
-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세상엔 늘 나만 있어서 이토록 아찔하다
- 무거운 것들만 남아 미동도 하지 않는 이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