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나온 시집  <기억의 행성> 중에서 -

<얼룩>

우리의 피는 무슨 色인가
목에서 흰 피가 솟구치고 캄캄한 천지에서 꽃비가 내렸다는 죽음도 있지만
어쩐지 당신도 한때 따뜻한 초록 피를 가졌을 것만 같다

色에 대한 학습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피는 붉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당신은 내게 자꾸 충고한다
내가 맛본 강력한 피의 기억은 분명한 검은색.

피부에 갇혀 얼음장 같은 살갗의 아래에서 그것은 한동안 몸 안에 고여 있다 천천히 식어가다가 어느 순간 역류했다
꾸역꾸역 올라오는 검은 덩어리들은

숨겨진 붉은 얼룩들의 기억으로 검게 변해버렸다
모든 상처는 왜 內傷이 되고 마는 걸까 붉은색과 검은색의 심연이 죽음이거나 비애인인 것은 얼룩 때문이다

빗방울이든 눈물이든 떨어지면 얼룩이 되고 마는 만유인력이 투명한 화석을 만든다
물이 바위를 뚫듯 빗방울이 대지를 푸르게 뚫는다

당신의 피는 변함없이 차갑고 어두운 붉은 색이어서 안전하겠지만
커다란 얼룩 때문에 내 몸은 천천히 어두워지고 있다
나도 한때 다른 色의 상처를 가졌던 적이 있다.


<헛되이 나는>

헛되이 나는 너의 얼굴을 보려 수많은 생을 헤매었다
거듭 태어나 너를 사랑하는 일은 괴로웠다

위미리 동백 보러 가 아픈 몸 그러안고서도, 큰엉해안이나 말미오름에서도, 빙하기 순록과 황곰 뼈의 화석이 나온 벌레못동굴 앞에까지 와서도 나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저 멀구슬나무나 담팔수, 먼나무가 당신과 아무 상관없다고 확신할 수 없는 이 생이다
너에게 너무 가까이도 멀리도 가지 않으려고

헛되이 나는, 이 먼 곳까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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