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천 보리밭>
류정환
지난 겨울 이 땅에서
뿌리만으로 나는 견디었다.
지금 비릿한 목숨을 꺼내어
바람결에 확인하는 것은
설렘이다. 오랜 그리움이다.
대물린 약속이다.
단단한 씨앗 하나 얻고자 함이다.
살아 있음으로 푸른 세상,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아
이 땅을 바람나게 하는 희망 하나
두근두근 간직하고자 함이다.
<얼음 주사위>
곽재구
눈이 옵니다
내 마음의 빈 들
나무 한 그루 서 있지 않은
허허로운 그 들에
펑펑 눈이 옵니다
삶은 정육면체의
얼음 주사위를 굴리는 일과 같습니다
얼음 주사위의 여섯 면에는
모두 전쟁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눈이 옵니다
사람들이 얼어붙은 손으로
얼음 주사위를 굴리며
빙판의 세상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닙니다
어딘가 존재할지도 모를
한줌의 사랑과 음악과
백합의 시간들을 꿈꾸며
얼음 주사위들이 서로 부딪고 깨지는 들 한가운데서
시래기국밥 한 그릇을 비우기도 합니다
눈이 옵니다
나무 한 그루 서 있지 않은
허허로운 들을 가로질러
얼음 주사위를 굴리는
사람들의 행렬 끝없습니다
<사는 이유>
최영미
투명한 것은 날 취하게 한다
시가 그렇고
술이 그렇고
아가의 뒤뚱한 걸음마가
어제 만난 그의 지친 얼굴이
안부없는 사랑이 그렇고
지하철을 접수한 여중생들의 깔깔웃음이
생각나면 구길 수 있는 흰 종이가
창 밖의 비가 그렇고
빗소리를 죽이는 강아지의 컹컹거림이
매일 되풀이되는 어머니의 넋두리가 그렇다
누군가와 싸울 때마다 난 투명해진다
치열하게
비어가며
투명해진다
아직 건재하다는 증명
아직 진통할 수 있다는 증명
아직 살아 있다는 무엇.
투명한 것끼리 투명하게 싸운 날은
아무리 마셔도 술이
오르지 않는다
<첫 마음>
박노해
한번은 다 바치고 다시
겨울나무로 서있는 벗들에게
저마다 지닌
상처 깊은 곳에
맑은 빛이 숨어 있다
첫 마음을 잃지 말자
그리고 성공하자
참혹하게 아름다운 우리
첫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