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황인숙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비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꿈, 견디기 힘든>

황동규


그대 벽 저편에서 중얼댄 말

나는 알아들었다

발 사이로 보이는 눈발

새벽 무렵이지만

날은 채 밝지 않았다

시계는 조금씩 가고 있다

거울 앞에서

그대는 몇 마디 말을 발음해 본다

나는 내가 아니다 발음해 본다

꿈을 견딘다는 건 힘든 일이다

꿈, 신분증에 채 안 들어가는

삶의 전부, 쌓아도 무너지고

쌓아도 무너지는 모래 위의 아침처럼 거기 있는 꿈





<이탈한 자가 문득> 

김중식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팔당대교 이야기>

박찬일


차가 강물에 추락하면 

상수원이 오염됩니다 

그러니 서행하기 바랍니다 


나는 차를 돌려 그 자리로 가 

난간을 들이받고 

강물에 추락하였습니다. 

기름을 흘리고 

상수원을 만방 더렵혔습니다 


밤이었습니다 

하늘에 글자가 새겨졌습니다 

별의 문자 말입니다 

승용차가 강물에 추락해서 

상수원이 오염되었습니다 

서행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죽은 것은 사람들이 모릅니다 

하느님도 모릅니다  



<겨울 강가에서>

안도현


어린 눈발들이, 다른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내리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들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랑법>

강은교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은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 있는 구름,

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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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나는> 최승자, <슬픔이 기쁨에게>, <슬픔을 위하여> 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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